대항해 시대를 대표하는 산타마리아호와 빅토리아호는 각각 신대륙 발견과 세계 일주라는 위대한 성과를 남긴 선박입니다. 이 두 배를 타고 항해한 승무원들은 비슷한 시기,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바다로 나섰지만, 그들의 생활환경은 항해 범위와 선박 구조, 항해 기간, 시대적 여건에 따라 현저히 달랐습니다. 산타마리아호와 빅토리아호에 탑승한 승무원들의 실제 생활을 중심으로 환경, 업무, 식사, 규율, 질병 등을 비교해 봅니다.
생활공간과 근무 구조: 협소함과 계층적 질서
산타마리아호는 콜럼버스가 사용한 3척의 선박 중 가장 크고 주요한 배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매우 작은 선박이었고, 약 40여 명의 승무원이 협소한 공간에서 함께 생활했습니다. 선원들은 갑판 아래 선체의 좁은 구획에 나무 널빤지로 구분된 공간에 모여 잠을 자거나 물품을 보관했습니다. 사생활은 거의 없었고, 침대 대신 자루나 나무판자 위에서 잡니다. 선장 콜럼버스를 포함한 장교와 고위 항해사는 선미탑 아래 상대적으로 넓고 개인 공간이 확보된 선실을 사용했습니다. 선박 위계는 명확했고, 항해사, 조타수, 갑판장, 선원 등 역할이 구분되었습니다. 당시 항해 경험이 있는 선원이 귀했기에, 기본적인 해양 기술을 갖춘 사람은 빠르게 승진하거나 임무를 부여받을 수 있었습니다. 빅토리아호는 마젤란 함대 중 규모가 가장 작았지만, 최종적으로 세계 일주를 완수한 유일한 배였습니다. 원정 당시 약 45~50명가량의 인원이 빅토리아호에 탑승했으며, 이들은 좁고 흔들리는 선체 안에서 장기간 생활했습니다. 항해가 3년이나 이어졌기 때문에, 공간의 협소함뿐 아니라 장기 체류를 위한 식량 저장, 숙소 정비, 선체 보강 등 다양한 작업을 항해 중 반복해야 했습니다. 승무원은 엄격한 계급 구조 하에 지휘를 받았으며, 특히 장거리 항해 중 반란이나 불복종에 대한 처벌은 가혹했습니다. 일일 업무 시간은 날씨와 항해 상황에 따라 달라졌고, 보통 4시간씩 교대로 당직을 서는 구조였습니다. 빅토리아호 승무원들은 수시로 상륙해 보급과 수리를 반복해야 했으며, 원정 후반에는 생존자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인원당 업무 강도가 배로 늘어났습니다.
식사와 위생: 한정된 물자와 극한 환경의 생존
산타마리아호의 식사는 주로 선박 출항 전 준비된 말린 육류, 딱딱한 비스킷, 콩, 염장 생선, 치즈 등이었습니다. 물은 항아리나 나무통에 담겨 저장되었지만, 몇 주 지나면 부패하거나 이끼가 끼는 일이 잦았습니다. 음료로는 와인이 제공되었으며, 이는 물의 부패를 늦추는 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바람이 없고 항해가 지연되면 식량이 줄었고, 곡물에 생기는 벌레나 곰팡이는 필수적으로 함께 섭취해야 했습니다. 위생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선박 내부에 화장실은 존재하지 않았고, 대부분 갑판 끝에 매달려 용변을 해결했습니다. 씻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옷은 수개월 간 갈아입지 않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이로 인해 피부 질환, 이, 벼룩 등 기생충 문제는 일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항해 기간이 길지 않아 상대적으로 극한 상황까지는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빅토리아호는 상황이 더 심각했습니다. 세계 일주 항해는 3년에 걸쳐 이루어졌고, 많은 경우 몇 달 동안 육지에 닿지 못했습니다. 장기 항해 중 물과 식량은 조기에 부패했고, 말린 음식과 함께 살아 있는 동물을 태워 육류를 공급하기도 했습니다. 항해 후반에는 톱밥, 가죽, 심지어 동물 가죽까지 삶아 먹은 기록이 있으며, 극한 상황에서는 영양실조로 인한 괴혈병이 대규모로 발생했습니다. 빅토리아호의 승무원 중 초기 45명 중 귀환자는 단 18명이었으며, 사망 원인의 상당수가 영양실조, 괴혈병, 열병 등 위생과 영양 문제였습니다. 위생 시설 역시 부족했고, 사체를 바다에 수장하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규율과 생존 전략: 조직력과 인내의 힘
산타마리아호에서의 규율은 비교적 간단했습니다. 항해는 짧은 기간이었고, 콜럼버스의 카리스마적 리더십 아래 명확한 명령 체계가 유지되었습니다. 다만 항해 후반, 대륙이 보이지 않자 일부 선원들 사이에 불만과 두려움이 생겨 항명 위기가 있었습니다.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콜럼버스는 거리를 속여 보고하거나 심리적 안정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대응했습니다. 산타마리아호 항해에서는 처벌보다는 협조적 분위기가 우세했고, 주요 목표는 항해 성공 자체에 집중되었습니다. 항해가 완료된 후 승무원들은 스페인으로 돌아와 일정 보상을 받았고, 이후 추가 항해에 참여하거나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에 투입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반면 빅토리아호는 훨씬 더 복잡한 갈등과 규율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장기 항해, 외국 항구 방문, 승무원 사망 등으로 인해 리더십은 수차례 교체되었고, 마젤란 사후 지휘 체계 혼란도 컸습니다. 항해 도중 반란이 일어나 선장을 암살하거나 탈출하는 사건도 있었으며, 승무원들 간 긴장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엘카노가 지휘권을 잡은 이후에도 철저한 규율과 일정 유지, 일지 기록 등을 통해 통제력을 유지했고, 생존자들은 교대로 임무를 수행하며 최소한의 조직력을 유지했습니다. 장기간 배 안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버텨야 했던 이들은 정신적 인내가 필수적이었으며, 실제로 정신질환이나 우울증에 가까운 증상도 자주 보고되었습니다.
산타마리아호와 빅토리아호는 모두 역사적 항해를 이룬 배들이지만, 그 안에서 살아간 승무원들의 삶은 크게 달랐습니다. 산타마리아호는 단기 항해와 탐사 중심, 비교적 안정된 구조를 가진 반면, 빅토리아호는 극한의 생존 상황 속에서 인류사적 도전을 완수해야 했습니다. 두 선박의 승무원들은 기술, 음식, 위생, 규율, 조직력 등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항해를 이끌어 갔으며, 그들의 희생과 경험은 오늘날까지도 탐험 정신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대항해 시대는 선장만이 아니라, 배 안의 모든 선원들의 인내와 협력으로 이루어진 결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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